2021/07/28 04:55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독서 일기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 미야자키 미치사다 씀 ;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2016


[송대 중국인의 과거생활]을 포스트했을 때 함부르거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추천해주신 책입니다. 당시 거주지 도서관에는 없고 사려고 해도 절판이었는지라 안타까워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경사스러운 일입니다ㅠㅠ

과거라는 제도를 클라이언트에게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여러분의 괴로움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며 운을 떼지요.
저자 또한 자신이 경험한 입시 지옥을 언급하며 시작하는데... 전쟁 후 유치원부터 대학, 취직까지도 경쟁인 현대를 살면서 상당한 감회를 느꼈다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경험한 지옥 쪽이 압도적으로 대단합니다! 이 책의 프로토타입격인 [과거]를 쓸 때 제2차 세계대전의 징집영장을 받아 전쟁터에 끌려가셨다지 않아요?! 게다가 저자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원고를 보관하고 있던 출판사 건물이 폭격을 받아 파이어- ....다행히 원고는 금고에 들어 있어서 구사일생. 그런 과정을 거쳐 펴낸 책의 리뉴얼이니만큼 더더욱 감회가 새로우셨다고요.

본격적인 서술로 들어가기 전에 상당히 상세한 과거 흐름도를 실어놓아 이 또한 근사했습니다!
현시-부시-원시-세시-과시-향시-거인복시-거인회시-회시부시-전시
원시에 합격해야 생원,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이 되었다지요. 원시부터 학정이 파견되어 감독하며 이는 총독, 순무와 같은 반열에 오르는 지방관입니다. 한 성의 학문을 책임지는 위치인데요... 지금으로 치면 교육감일까요!?
이 일련의 시험 웨이브에서 치르는 과목- 사서오경은 총합 43만여 자!!! 이것을 모두 딸딸 외워야 합격의 가능성이라도 생기니 정말이지 몸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이지...... 요즘 공무원 시험 같은 것은 아주 싸다구를 날려버립니다. 현대에 태어나서 고마워요.

이어지는 과거의 묘사는 과연 그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감탄했습니다.
향시의 공원(시험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괴담도 흥미진진했습니다. 공원은 과거시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완전히 폐쇄되어 지방관의 권위조차 통하지 않으니, 관직에 오른 사람은 그래도 알아모시는 중국의 귀신들에게는 원한을 풀 절호의 기회였겠지요. 버림받은 여성의 망령이 호사(각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방)에 들이닥쳤다가 '앗 ㅈㅅ 여기가 아니네요' 하고 물러가는 일화가 몇이나 있습니다. ....웃으면 안 될 일인데 뿜기네요.....

이 책에서는 과거 제도가 완전히 정비된 명청대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요... 사실 대학교 학부 정도의 중국사에서는 과거 시험의 정형문인 팔고문이 지식인의 창의력을 빼앗아 다가오는 근대에 중국이 서세동점을 당하게 되는 요인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다문 팔고문만 문제는 아니었던 듯한 생각이 듭니다.

우선 '성유광훈'. 명 태조의 성유육언(육유인가?)을 강희제가 16조로 확대하고 옹정제가 해설을 붙인 문장으로 답안을 작성할 때 그 중 지정된 1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베껴써야 했다고 합니다. 우와...... 대한민국에서도 군사정권 당시 도덕/윤리 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써내려가도록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청나라가 시대를 앞선 국가주의라고 감탄해줘야 하는 걸까요, 군사정권이 청나라 때나 할 법한 구시대적인 교육을 강행했다고 탄복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전시! 옥좌가 있는 보화전에서 치르었다는데요, 황제가 마땅히 감독해야 하지만 청대에는 잘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사실상 독권대신이 감독 및 등위 지정하는 형태였다나요.
여기에서는 답안을 작성할 때 더욱 엄격한 원칙이 적용되었으니, 대두라고 합니다. 신臣이라는 자신의 지칭은 왼쪽 위에 작게 올려쓰고 황제나 황제 관련 글자는 두 칸 위(쌍대), 황제의 부모나 조상은 세 칸 위(삼대), 수도, 국가, 궁전에 대한 글자는 한 칸 위에 올려써서(단대).... 아니, 이러한 작성법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창의력이 소실하겠어요. 저같이 글씨 못 쓰는 사람은 공원에 발도 못 들였을 겁니다.

물론 저자도 과거제가 혁신 사상을 막은 점을 지적합니다. 헌데 여기에 더해 선행을 하면 신이나 귀신이 도와 합격하고, 악행을 저지르면 불합격하는 도교 사상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음? 갑분도교?....
하지만 어쨌든 공평을 추구하는 과거의 기본 이념과 신분을 불문한 권선징악은 분명 그 시대로 보건대 진보적인 면도 있다고요....
도교와 권선징악을 연결지을 수 있는지는 좀 미묘하긴 한데..... 제 기분상....

이런저런 과거에 대한 책을 두루 읽고 난 후, 명청대에 완성된 과거에 관해 다룬 이 책에 이르름은 훌륭한 대단원이었습니다.
....아니, 또 재미있는 과거 관련 책이 있으면 마구 읽어버릴 거라구요. 얼마든지 추천해주세요!

덧글

  • 함부르거 2021/07/28 10:58 # 답글

    책 구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 읽고 싶은 책 못 구하면 병나는데 다행이에요. ㅋㅋㅋ

    중국 사람들이 의외로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출세하기 위해선 유학을 공부하지만 기저에 깔려 있는 신앙은 도교랄까요. 시험은 유학으로 치르지만 합격 여부는 신명이 정한다는 느낌이죠. 미야자키 선생은 이 점을 흥미로워 한 거 같아요. 지금도 중화권에서 가장 성업하는 종교기관은 도교 사원이더라구요.

    우리 나라 양반들도 겉으론 철저한 유학자였을 지 몰라도 부인네들은 열심히 절에 다녔고, 일본인들은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명절 참배는 신사에 하죠. 이런 다중 종교생활은 동아시아 전반의 특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 진냥 2021/07/29 07:10 #

    추천받은지 어언 8년만이군요..... 흑흑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ㅠㅠ

    [태평광기] 신선편이라든가 [신선전], 그밖에 [수신기] 등 우화등선을 하여 도교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화를 보면 딱히 선善행이 선仙업을 이루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 않은 인과라 신기합니다. 역으로 불교의 목표도 부처가 되는 것이지만, 선행을 통해 복을 얻어 일신의 부귀영화를 이루는 일화가 단지 중국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두루 남겨져 있으니 신기한 노릇이네요.

    다중종교생활...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 rumic71 2021/07/28 12:06 # 답글

    국민교육헌장이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게 시키기도 하고 중간쯤에 넘겨받아 외우게 하기도 했죠.

    http://rumic71.egloos.com/m/4199804
  • 진냥 2021/07/29 07:12 #

    아앗!!! 저도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와 비슷한 거였는데~ 하면서도 기억이 퍼뜩 안나서 끙끙 앓다가 적당히 썼는데!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http://romancer.egloos.com/6332297

    군사정권 시기의 교사는 '국민교육헌장은 총 몇 자인가' 같은 변화구를 던졌다 하니... 청의 과거제도보다 더 악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엑셀리온 2021/07/28 13:40 # 답글

    유교가 종교적 측면, 특히 기복신앙적인 측면이 굉장히 약하니 동아시아 사람들은 유교의 지배에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난 기복신앙이 필요했겠죠.

    그것이 중국에서는 도교, 한국에서는 불교, 일본에서는 불교+신토.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재미있는 건 중국과 일본은 나름 자신들의 고유한 원시적 기복신앙이 발달해서 점차 도교니 신토니 하는 형태로 전문화, 고도화 되는 모습으로 발전해서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왜 한국은 불교가 한반도 고유의 기복원시신앙인 무속을 거의 다 먹어 버리고 주류의 기복신앙으로 대체됐는지 좀 의문스러운 부분입니다.
  • 진냥 2021/07/29 07:17 #

    제가 어쩌다 신토를 마구 공부하여 느낀 인상으로는 19세기까지 신토는 딱히 전문화나 고도화되기보다는 강하게 신불습합하는 형태로, 지역의 민간 신앙으로 남아있었던 듯 합니다. 이세의 재궁으로 봉직한 것이 '죄를 지은 것'이 되어 불사를 베출어 죄를 씻어야 하고, 에도 시대 참배 산업이라고 할 정도로 활성화된 참배 문화에서도 중심은 어디까지나 유명한 절이었으니까요.
    신토가 고도화되고 전문화된 때는 19세기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 신토로 격상되면서부터.... 하지만 국가 신토는 신토의 본질을 짓밟았다는 점에서 부모님의 원쑤나 다름없답니다=ㅅ=

    진냥의 부모님 : ?
  • 은이 2021/07/28 14:25 # 답글

    전산화는 커녕 서류화도 쉽지 않은 시대다 보니, 결국 공정한 진급은 닥치고 시험! 인듯 싶습니다.
    서류화 하면 복사 = 손으로 빼껴쓰기... 하는 직책도 있었다 하는 시대니 (...)

    그리고 진리의 $ .. !!!
  • 진냥 2021/07/29 07:18 #

    과거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노력은 상당하지요... 이정도면 인정해줄까, 라는 느낌도 들고....
  • 존다리안 2021/07/28 14:33 # 답글

    유불선은 동아시아에서 하나도 빼기 힘든 전통입니다.
    조선도 거기서 못 벗어났죠.
    지금 한국은 여기에 기독교라는 서양 영향까지 들어와 가치관이 더욱 복잡해지는 듯 합니다.
  • 진냥 2021/07/29 07:18 #

    조선이 도교의 전통에서 못 벗어났다고 하면 조광조가 빡칠 거 강은데요 ....
  • 함부르거 2021/07/29 15:04 #

    그 조광조의 시대에 북창 정염 선생 같은 분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임진왜란기의 최풍헌 전설이나 진묵대사, 구한말 동학의 최수운 선사까지 역사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꾸준히 선가(仙家)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어요. 이게 또 파고 들어가면 중국 도교하곤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단 말이죠...
  • 無碍子 2021/07/28 20:21 # 답글

    남아수독오거서라고 해봐야 목간 한 수레의 정보량은 책 몇권을 넘지않고, 사서삼경의 정보량은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보다 적지않습니까.

    더구나 선현의 글을 비판하거나 다른해석을 하는게 허락되지않지요.

    배워야 할 정보의 양이 적었기때문에 얼마나 아름답게 외는지, 아름답게 쓰는지로 판가름 할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 진냥 2021/07/29 07:26 #

    사서오경은 과거의 문턱에 발이라도 들이기 위한 최소량이고, 실상 여러 역사서와 법령집, 유명한 문구까지 통달해야 하는데다 한자의 지식 구성은 현대 초등학교 교과서의 지식 구성과 판이하게 다른 양상이니 많고 적음을 감히 논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현대 중국인도 당장 쓰는 한자가 아니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수시로 연습해야 하는 판이니까요.

    팔고문은 실상 아름다운 문장을 쓰기 위한 노력보다, 이미 과거를 합격한 사람의 문장을 맹목적으로 베껴쓰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데에 불과했습니다.

  • RuBisCO 2021/07/30 09:17 #

    한자를 너무 만만하게 보시는데 고대 언어·문자체계의 원시성을 5천년동안 끌어안고 고치지 않고 이어온 문자체계라서 단순히 익혀야 할게 한자로 되어있다는 것 만으로도 익혀야할 정보량의 인플레가 지옥으로 날아갑니다... 20세기 초의 지자들이 괜히 한자불멸중국필망을 외쳐댄게 아니죠.
  • 無碍子 2021/07/29 11:31 #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이긴 하지만, 과거 시대 유학자들이 일생 동안 문자로 습득하는 정보의 양은 초등학교 전 학년 교과서의 절반도 되지 않을 거로 봅니다.
  • RuBisCO 2021/07/29 09:45 # 답글

    사실 저걸 지옥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는게 한자라는 문자체계의 심각한 결함이었죠. 단순히 한자라는 문자체계 자체를 사용하는 것 만으로도 습득해야할 정보량의 인플레가 지옥같이 불어나는 판이라 보통 노력으로는 기본을 익히는 것 조차도 벅찬...
  • 진냥 2021/07/30 09:03 #

    그러고보니 제가 클라이언트에게 역사를 설명할 때 한자를 곁들여 써가며 설명하는 일이 있었단 말이지요? 특히 무武... 그런데 오른쪽 변을 弋으로 써야 하는데 어느 순간 戈처럼 쓰고 있지 뭡니까. 한문 전공하신 분이 지나가다 보시고는 제 기분이 불쾌할까봐 민망해하시면서도 슬쩍 고쳐주셨답니다. 늘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한자의 길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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